'논'에 해당하는 글 8건

  1. 2010/06/04 가족과 결혼
  2. 2010/02/17 아이돌
  3. 2010/01/08 경쟁교육과 미래
  4. 2009/08/24 설득과 다수결
  5. 2009/06/15 인신공격의 오류
  6. 2009/03/02 영어공화국
  7. 2008/11/21 전쟁과 평화
  8. 2008/07/23 배부르게, 양껏 먹고 싶다고?

가족과 결혼

이성 2010/06/04 17:09

 

 

 

0.

 

가족은 소중하다. 감히 누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가족은 혈연, 입양, 결혼을 통해 만들어지거나 조직된다. 구성원 서로가 특정한 계약관계 없이 사랑과 믿음을 주고받는 관계다. 어린 아이는 그 속에서 성장하며 자아를 형성하며 부부는 서로에 대한 무한에 가까운 신뢰와 자식에 대한 애정을 통해 자기완성의 한 축을 형성한다. 그래서 ‘자장면이 싫다하신 어머니’와 ‘우리가 있으니 힘내는 아빠’가 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묵묵히 집을 지키는 어머니와 항상 의연한 듯 우뚝 서 있는 아버지를 살짝 넘어서도 아웅다웅 재미나게 살아가는 가족을 보여주는 시트콤과 출생의 비밀을 배경으로 복수와 화해를 안고 흐르는 드라마 그리고 유괴된 딸을 찾다가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되는 영화, 갑자기 사라진 엄마를 찾는 가족과 암 선고를 받은 인생 후반의 아버지의 쓸쓸한 독백 등 우리 주변엔 ‘가족’이 넘치도록 인기를 구가한다. 그런 인기의 근원은 무엇이며, 보여주는 가족의 모습과 역할은 어떠하며 결국 나는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1.

 

그런데 가족 관계를 형성하는 기본적으로 방법인 결혼을 무덤이라고 하고 미친 짓이라고 하는 말도 아주 일반적이다. 예식장을 나서는 순간까지는 모르지만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의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순간 결혼은 현실이 되고 차차 연애할 때의 깨소금 같은 달콤함과 감전되듯 짜릿한 설레임은 아주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상당부분 완화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여전히 곤고한 가부장적 질서와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맞이하게 된다. 시댁 식구와의 관계는 어색하고 집안 대소사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스트레스를 주기 마련이다. 직장 생활을 병행한다면 직장에서의 자기 완성을 위해 쏟아야할 에너지가 분산되는 것에 신경질이 날 것이다. 여건이 아주 훌륭하지 않다면 결혼과 육아 때문에 자신의 꿈을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 사이에 멈추게 되는 충격을 겪어야 한다. 임신,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길고 길고 고되고 고된 노동에 비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라는 환희의 순간은 짧디 짧다. 남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수면 시간을 제외하면 서너 시간에 불과하고 부부 사이의 대화는 가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실무의 처리에 필요한 업무 분담과 그것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수준이다. 그러면서 남편의 몰랐던 모습과 변해가는 모습에 적지 않게 실망할 수 있다. 당연히 자신의 꿈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따르며 우울증도 올 수 있다. 늙어 할머니가 됐을 때는 뼈가 빠지도록 손자, 손녀를 돌봐야 할지도 모른다.

 

남성은 어쨌거나 가장의 책임이 어깨를 누르게 된다. 맞벌이가 오히려 더 무거운 책임을 줄 것이다. 상시적인 고용불안 속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은 더욱 커질 것이며 또 한참 일할 나이라 직장 생활은 결혼 전보다 훨씬 빡빡할 것이다. 이어지는 야근에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겠지만 끝없는 집안일을 모른 척하거나 지켜볼 수는 없다. 아내가 자신을 여전히 애인처럼 대해주기를 바라고 소박한 자존심이나마 지켜주기를 원하지만 남편은 남편일 뿐 마냥 아끼고 기대고 싶은 애인은 아니다. 주말은 쉬는 날이 아니라 집안일을 하는 날이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게 되면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하고 노래를 부르지만 ‘너희가 있어 더 힘들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슈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다면 아내와 아이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자리는 점점 좁아지며 자존감도 상실되며 그저 장롱처럼 방 한편 어딘가에 있는 가구로 전락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언젠가는 닥쳐올 황혼이혼을 하루 하루 연기하며 살아갈 것이다.

 

2.

 

너무 가혹하게 나열했지만 정말 결혼은 미친 짓일까? 결혼이 행복한 분홍색이 아니라면 굳이 결혼을 하고 가족을 구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아가 가족의 역할은 무엇일까? 가족의 위기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자주 근거로 드는 것 중 하나인 가정의 비즈니스화와 아웃소싱 도입은 또 어떤가? 유아기 보육 과정과 각종 집안 행사 등이 쉬운 예가 되겠지만,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다. 특정 이벤트를 통해 집중적으로 짧은 시간에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서 아주 효율적으로 서로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고 자위하고 부모 스스로가 해야 할 일과 자식이 가족 내부에서 해야 할 일을 아웃소싱, 즉 외부 서비스 업체, 기관에 의존하는 일 말이다. 가족과 그 구성원의 역할이 이렇게 개별화되어 있다면 굳이 기존 가족형태를 정형적인 모델로 삼을 까닭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예외적인 경우나 고쳐야할 경우로 한정해야 할 것인가?

 

전통적이거나 기존의 가족 형태가 아닌 새로운 가족 형태가 늘어나는 일도 주목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0년에는 독신가구가 15.5%였는데, 2005년에는 나홀로 사는 독신가구가 20%를 차지했다.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거나 이혼 후 혼자 사는 사람 뿐 아니라 독거노인의 수도 그 안에 상당하다. 또 자녀와 함께 살기는 하나 싱글맘과 싱글대디의 증가는 독신 가구 수에는 잡히지 않지만 새로운 가족 형태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는 많지 않다지만, 동성부부와 입양 자녀로 구성된 가족의 증가도 충분히 고려할 요소다. 정자은행을 통해 자식을 낳아 기르는 형태의 등장도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새로운 가족 형태는 기존 가족 형태를 선택하지 않거나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지향하지 않는 사람들이 조직하는 모델이다.

 

3.

 

따지고 보면 현재의 부계 혈통의 강화에 기반한 일부일처제 가족제도와 그 구성원 사이의 질서와 역할, 책임은 인류의 역사 전체를 볼 때 아주 최근의 일이다. 혈연가족에서 시작한 인류가 근친상간의 금지를 통해 집단의 교류가 강제되고 이질적인 집단 사이의 협력과 갈등을 통해 사회가 발전했다는 아주 오래된 시절부터 생각하면 말이다. 최근의 제도가 가장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완벽한 제도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가부장적 질서가 여전히 위세을 가진 경우는 더욱 그렇다. 또 결혼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 제한을 전제로 한다. 자유로운 개개인이 모두 주체가 되어야 하는 민주주의와는 상충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가족을 최우선으로 삼는 가족주의는 민주주의 안에서 굴절된 야만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살펴본 근래에 보이는 새로운 유형의 가족 형태는 걱정하며 고쳐야 하는 대상이 아닐 수 있다. 또 그 앞에서 다소 과장하여 묘사했지만 결혼한 사람이라면 공감하는 부분도 많을 분홍빛이 아닌 결혼 생활은 일반적이며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정형화된 모델이 개인의 자의식과 사회의 변화 속도에 맞지 않다는 증거다.

 

아, 물론 현재의 가족 제도를 한 번에 갈아엎자는 과격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단단한 기존 가족질서의 유지를 자명한 가치로 상정하고 강한 아버지, 뛰어난 어머니, 부부 간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랑, 자식들의 지극한 효도, 100점짜리 남편, 아내, 아빠, 엄마, 아들, 딸을 향한 거침없는 질주와 그것에 대한 동경은 그만하자는 얘기다. 결혼 이후 서로에 대한 책임도 가족 간의 의무는 보다 유연해 져야 한다. 이미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다양한 가족 형태가 등장했고 엄정하게 자리고 있다. 하지만 결혼은 미친 짓도 아니고 무덤도 아니다. 개인과 가족, 그 갈등 사이에서 형성되는 자기 정체성의 확립과 세계 인식이 중요한 것이지 나와 DNA를 나눈 아버지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사회가 엉망일수록 가족에 대한 의존도는 높다. 숱한 영화와 드라마들이 건드리는 부분도 그 점이다. 거꾸로 보자, 가족에 대한 새로운 인식, 요새 말로 ‘개념’을 잡아야 사회를 바로 만들 수 있다.

 

계간 <논>, 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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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이성 2010/02/17 16:51

 

아이돌

 

 

0.
  아이돌, 연예계를 주름잡는 그들에겐 거칠 것이 없다. 가요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예능 프로그램과 시트콤을 넘어 드라마에서도 그들을 볼 수 있다. 교복 광고에 그치던 그들이 거의 모든 상품의 CF 모델을 접수한 지는 오래전 일이다. TV에서 뛰쳐나와 뮤지컬 무대에서 그들을 만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며, 각종 게임 속 캐릭터로 변신하여 같이 농구도 하고, 총도 쏜다. 핸드폰과 블로그에선 그들의 손글씨체를 만날 수 있다. 음반, 음원 판매 순위는 물론이고 검색어 순위에도 늘 상위에 오른다. 포털 사이트에서는 그들의 활동에 대한 일반인들의 리뷰들이 연일 수도 없이 쌓인다. 그들은 대중문화의 중심이고, 미디어와 IT의 전방위적 콘텐츠다.


 

  그들의 노래와 춤은 최고다. 원더걸스의 ‘텔미, 텔미’든 소녀시대의 ‘오빠, 오빠’든 나의 입과 귀를 맴도는 후크송도 좋고, 브아걸의 시건방춤이든 카라의 엉덩이춤이든 이른바 포인트 댄스도 따라하고 싶다. 초콜릿 복근과 꿀벅지는 아저씨의 마음도 설레게 한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지만, 고래가 진작 아이돌의 노래와 춤을 봤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대가 아닌 예능프로그램에서 보이는 그들의 솔직한 모습도 보기 좋다. 노력했지만 여전히 누가 누구인지 헷갈리고 멤버의 수도 잘 모르지만, 초등학교 저학년인 조카가 노래방에서 열심히 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습은 귀엽기 그지없다.

 

1.
  본래 아이돌(idol)은 우상(優像)을 의미하는 영어라지만 저 유명한 링컨의 말을 빌어서 표현하자면 ‘아이들의, 아이들에 의한, 아이들을 위한’ 가수들을 가리킨다. 아, 물론 나를 포함한 삼촌, 이모들에 이르는 폭 넓은 연령의 팬을 확보한 이른바 ‘국민 아이돌’도 적지 않고, 이른바 ‘성인돌’이라고 불리는 어른 멤버로 구성된 경우도 있지만 보편적인 특징들을 모아본다면 앞의 표현이 그리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여기에 조건을 하나 더 붙이자면, 그들은 대형 기획사에 의해 오랜 시간 동안 노래와 춤, 연기력과 개인기, 얼굴과 몸매 또는 근육 등을 양성 받거나 만드는 ‘연습생’ 시절을 겪은 후 등장한다. 숨 막히도록 혹독한 연습생 시절은 있지만 예전 가수들이 얘기하는 눈물 젖은 빵을 먹는 서러운 무명 시절은 없는 셈이다.


  알기 쉽게 조금 과장하여 얘기하면 혼자 힘으로 가수가 되겠다고 기타 하나들고 고군분투하는 방법은 아주 오래 전 시대의 유물이며 무엇이 대중의 요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기획사가 그에 맞는 가수와 노래를 준비하여 멋지게 대중 앞에 등장시키는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 뿐이라는 점 말이다. 대중문화 전문가들이 아이돌에 대해 말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이 지점도 빼놓지 않고 거론하는 이유도 그 주인공이 주로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이고 단순히 노래들 듣고 즐기는 수준을 넘어 그들이 곧장 온갖 미디어와 IT의 전방위적 콘텐츠로 작동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자칫 어느 누구와 집단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생각되지 않는다.

 

2.
  아이돌 가수와 그들의 노래는 높은 수준의 음악성 보다는 매우 높은 상품성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가창력을 기본으로 한 미적 완성도만이 가수에게 기대하는 콘텐츠가 아니고 노래를 포함한 공연 자체의 다양한 퍼포먼스를 사람들이 즐기기 때문이다. 가창력이 좀 부족한 사람과 댄스 실력이 좀 부족한 사람, 또 악기 연주나 외국어 능력, 개인기나 외모, 의사소통 능력 등이 조금씩 부족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 ‘그룹’을 이루어 서로 도와서 하나의 완성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셈이다. 거꾸로 보면 서로의 장점을 모아 단점을 극복하는 방식이니 참 좋은 방법이다. 다만 음악성에 방점을 찍는 가수와 팬들에게는 서 있을 공간과 시간이 없다. 음악이 유통될 수 있는 거의 모든 통로가 오로지 시장에서의 가치가 높은 아이돌에만 집중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대중음악계에 다양성과 개성을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앞말에 이어진다. 같은 장르의 엇비슷한 노래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바로바로 소비되는 방법은 일회성과 즉시성을 갖는다. 가수들의 퍼포먼스(노래를 포함한)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즐길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은 주어지지도 않는다. 좋은 노래를 짧은 시간에 빨리 소비해버리는 일은 어쩌면 낭비일 수도 있다. 또 아이돌의 음악이 아닌 다른 음악을 찾는 순간 마니아 취향을 가진 소수자 집단에 속하게 되니 뭔가 어그러진 것은 분명하다. 오락과 유희의 종류와 방법이 대단히 좁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다.


  하나더, ‘섹시하다’는 말을 일상에서 만나는 이성에게 함부로 말하기는 여전히 어려운데, 아이돌 가수들에게 섹시하다고 말하고, 초콜릿 복근을 보여 달라고 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즉 그들의 선정성도 또한 생각해볼 문제다. 가사, 의상, 안무, 무대장치 등에서 보이는 선정성은 ‘야하다’를 넘어서는 경우가 빈번하다. 성은 건강한 것이지만, 겉으로 드러낼 때는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 소비되는 상품으로서의 자리라면 더욱 그렇다. 수위의 조절도 필요하겠지만 경쟁하듯 보다 자극적인 소재를 선택하는 경향도 그리 달갑지 않다. 표피적인 즐거움을 주는 방법으로써 너무 쉽게 성이 이용된다면 더욱 그렇다. 청소년을 주된 소비 계층으로 삼는다면 더더욱 그렇다. 성은 건강하지만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니니 때문이다.

 

3.
  이렇게 염려의 대상이 된 대중음악계의 가장 큰 힘은 대형 기획사가 가지고 있다. 말 그대로 ‘기획’된 가수와 노래에 의해 큰 판이 움직인다. 그 영향력은 음악을 넘어 대중문화 전부에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 맞는 책임을 충분히 요구받아야 할 것이다. 가장 걱정스런 점은 아이돌 음악을 즐기고 있는 대중들이 단면화 되는 경향이다. 인간은 매우 다양한 음악과 즐길거리를 통해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감수성과 사고력을 키울 수 있고 그로인해 보다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오락, 유희란 게 그런 필요의 수단이 아니겠는가? 좁디 좁은 바탕과 편식에 따른 영양 부족은 심히 걱정된다.


  또 그것은 굳이 저명한 대중문화 연구가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대중의 단순화, 현실에의 망각과 무관심의 확장이라는 더 큰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더 많은 것을 경험해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자극적이고 일회적인 유희만을 제공한다면 그들이 주인공일 미래 역시 현재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수 있다. 소녀시대를 따라 소원을 수없이 말해봐야 상상 속에서의 일일 뿐이다. 화려함 뒤의 몽매함이라면 반갑지 않다.

 

4.
  최근 인디밴드 와이낫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표절의 유무를 따지고, 그들의 노래인 파랑새를 1위로 만드는 운동을 하는 등의 활동은 특정인이나 집단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대형 기획사를 향한 인디를 포함한 소수자들의 목소리로 해석된다. 큰 판으로 보면 우리의 대중문화가 대형 기획사, 유명 작곡가, 훈련된 아이돌에 의한 시각적이고 표피적이며 일회성 오락거리로만 가득하다면 인간이 즐길 수 있는 유희가 너무나 단순화되고 제한되기 때문이다.

 

 

계간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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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낫, 최근 공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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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교육과 미래

이성 2010/01/08 18:18

경쟁교육과 미래

 


0.
경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는 실로 대단한 것들이다. 동물에게는 먹잇감과 짝짓기를 할 대상일 테며 인간에게는 부와 명예 등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 서로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가는 과정 속에서 전체 집단이 성장,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식물의 진화는 승리한 개체들의 생존과 성장 과정이며 곧장 발달, 발전 과정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경쟁’이라는 방법을 제외하고 다른 방법을 통한 성장, 발전을 기획하거나 상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경쟁을 기획할 때 잊지 말고 상기해야 하는 속성들, 곧 경쟁의 전제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더 열심히 한 사람에게는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가 발생하며 노력한 만큼, 때론 그 이상의 대가가 돌아갈 수 있다는 전제, 바꾸어 얘기하면 누군가에는 보상이 적게 돌아간다는 전제이며 두 번째는 누구나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상태, 환경이라는 전제다. 마지막 것은 보다 본질적인 것인데 우리가 얻고자 하는 부나 명예, 평판 등을 누구나 서로 더 많이 차지하려 한다는 전제다.

 

1.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를 응원하며 아사다 마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이유는 1, 2등을 서로 겨루는 두 선수가 서로를 견제하며 자신의 점프와 회전, 턴 등의 기술과 그에 상응하는 연기력을 향상하여 보다 높은 수준의 피겨스케이팅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프로 골퍼 양용은에 대해 주목하는 이유도 그가 최고의 선수인 타이거 우즈와 같은 조에 편성되어 경쟁하여 우승한 점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스스로와의 싸움이 더 힘들다고 하는 이유도 경쟁자 없이 자신의 실력을 키우는 것이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이글의 논점에 맞추어 중고등학교 교육 부분에 한정지어보면 학생 개개인 사이의 경쟁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 또 교사와 교사 사이의 경쟁, 학교와 학교 사이의 경쟁도 있다. 좀 더 구도를 바꾸면 학교와 학원, 공교육와 사교육 사이의 경쟁도 불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사교육 안에서는 경쟁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학생들은 옆에서 공부하는 친구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아 학업 성취도를 높여야 한다. 적절한 경쟁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제도적으로 성적이 비슷한 그룹을 따로 만들기도 한다. 학교 안에서는 수준별 이동수업이 존재하며 학교와 학교 사이에는 특목고와 일반고의 구분이 엄연하다. 기준을 위해서는 ‘평가’가 필요하기에 학생들은 쉴 사이 없이 시험을 치르며 교사평가도 곧 시행될 기세다. 일반고와 특목고 사이의 평가는 이미 답이 나온 상태이며 대입 진학률, 특히 명문대 진학률과 수능 성적 공개 등의 추가적인 방식을 통해 전국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모든 경쟁을 통해 우리가 추구하는, 가지려고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보다 높은 수준의 학업 성취도와 그에 상응하는 우수한 인재 양성, 그리고 그런 인재들이 만들어낼 선진 한국에 대한 기대일까?

 

2.
문제는 앞에서 지적한 경쟁의 전제들을 하나씩 짚어보는 것으로 잡아낼 수 있다. 우선 위와 같이 경쟁교육이 일반화되어 있는데 그런 경쟁을 통해 얻는, 얻고자하는 보상 또는 목적의 불분명성이다. 두 번째는 그런 경쟁의 전제가 되는 공평한 기회의 부여, 즉 교육기회의 균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제도가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점이다. 마지막은 경쟁교육 이외의 다른 방법을 통한 인재 양성의 노력 여부다.
 

학생들 스스로 학업 능력에 대한 경쟁심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우선 공부부터 해야한다.’는 흔하고 그만큼 지당해 보이는 이 말은 경쟁심이 보상에 대한 기대에서 충동되는 점을 적절히 이용한 논리다. 하고 싶은 일, 자신의 적성에 따른 직업을 파악할 수 없는 상태인 대부분의 중고등학생들에겐 너무나도 적절한 논리다. 시쳇말로 바꾸면 ‘닥치고 공부’다. 대학에 진학할 때 학과, 전공을 정하는 그 순간에도, 또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스스로의 적성에 따른 ‘하고 싶은 일과 그에 따른 일’을 찾지 못한다. 심지어 없거나 나쁜 것으로 알고 있었던 직업의 귀천과 학벌은 생각보다 단단히 존재하며 스스로도 그 속에 이미 융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그 사실을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닥치고 공부’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자, 묻는다. 학생들은 왜 스스로의 학업 능력을 위해 경쟁해야 하는가?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잘하는 일이 우선 중요하다면 공부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부할 수 있고, 그런 좋은 환경이 마련된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가? 가난했지만 서울대에 진학하여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을 들은 내 친구는 자기는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우리가 대학갈 때’가 요즘 같다면 자신은 서울대는커녕 이른바 ‘인서울’도 힘들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여당의 한 국회의원은 외고 폐지를 얘기하면서 자신과 총리의 ‘개천에서 용난’ 사례를 들기도 했다. 그는 외고가 사교육의 주범이라는 방향에서 접근하였다.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더욱 강성해 지고 있는 경쟁교육 체제 아래에서의 외고 폐지나 축소가 사교육 수요를 막을 수 있다는 데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꼭 경제력이 기준이 아니어도 우리에게 교육기회의 부여가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모든 것이 경제력에 귀결되는 것은 맞지만 말이다.
 

셋째, 경쟁이라는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가라는 점이다. 또는 경쟁교육을 미진함을 보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이나 해봤는가라는 점이다. 나아가 경쟁교육을 통해 얻어지는 학업 능력이 과연 우수한 인재임을 증명하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학업 능력이 경쟁을 통해 상당히 효율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경쟁의 방식만이 유효한 가는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또 미래는 아니 현재는 남과 다른 창의성을 갖춘 인재, 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난 인재,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인재가 오로지 학업 능력, 그것도 주요 과목의 성취 능력만을 우선하는 현재의 경쟁교육 체제 안에서 길러질 수 있는지 의문이다. 본질적으로는 경쟁을 통한 보상을 그 승리자가 더 많이, 때론 과독점하는 게 과연 좋은가라는 부분도 생각해 봐야 한다.

 

3.
우리나라의 지극히 낮은 출산율의 문제를 풀기위해 미래기획위원회에서는 취학연령을 낮추는 방법을 제안하고 공론화 시켰다. “저출산? 다른 것 없습니다. 애를 가지는 행복보다 애 키우는 비용이 크니까 문제죠.”라고 말하는 위원장의 말은 대단히 충격적이다.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느끼는 행복의 가치를 어떻게 셈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비용’이 교육에도 그렇게 쉽게 습합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자녀를 키우는 데 필요한 비용이 경쟁교육의 강화 아래에서 더욱 커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참담하다. 경제학자 출신의 그에게는 모든 것이 비용으로 금방 환치될 수 있는지 모르나, 우리가 기획하는 미래가 먹잇감이나 짝짓기 대상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으르렁 거리는 살벌한 정글이 아닌 이상 교육, 경쟁교육에 대한 미래기획이 우선한 뒤에 자녀를 키우는 비용을 따지는 게 순서에 맞지 않을까 한다. 물론 그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무한경쟁교육이라는 답을 이미 가지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계간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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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과 다수결

이성 2009/08/24 11:31

설득과 다수결

 

1.

다수결이라는 원칙이 있다. 때론 ‘민주주의의 기본은 다수결’이라는 말도 자주 듣는다. 다수결이란 의견이 다른 여러 사람이 있을 경우 더 많은 사람의 의견에 따르는 방식이다. 회의라는 자리에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네 명이 중국 요리 식당에 갔는데 세 명은 자장면을 먹겠다고 하고 나머지 한 명은 짬뽕을 먹겠다고 하면, 처음 짬뽕을 먹겠다는 사람은 ‘같은 것 시켜야 빨리 나오기’ 때문에 그냥 자장면을 먹겠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아주 효율적인 선택이다. 또 그깟 짬뽕 한 번, 지금 안 먹어도 별 일은 없다. 하지만 처음에 짬뽕을 먹고 싶었던 그 생각은 너무 쉽게 버려진다. 왜 내가 짬뽕을 먹고 싶었던가? 너무 일상적인 예시지만 우린 그와 같은 경우를 아주 중요한 회의 자리에서도 경험하거나 목격한다. ‘에이, 그냥 너도 자장면 먹어’하는 말을 듣는 경우 말이다.
 
2.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은 초등학교 때 학급 회장을 뽑고 학급 회의를 하면서 다수결에 대해 가장 실제적으로 알게 되지 않나 싶다. 회장 후보자가 나서거나 추천을 받고나면 소견 발표를 거쳐 투표가 이어진다. 보다 많은 표를 얻은 후보자가 회장이 되고 학급 회의라는 것을 하게 된다. 아주 소소한 일이지만 학생들에게는 중요할 수 있는 사안들이 회의 안건에 올라오면 ‘특별한 의사 교환 없이’ 다수결에 따라 결정된다. 물론 찬성하는 학생과 반대하는 학생, 또는 제 3의 의견을 가진 학생이 등장하여 때론 열띤 토론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 보다는 그냥 거수투표를 통해 다수결의 원칙에 따른다. 또 그 과정에서 의견이 다른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거나 조정하는 경우 보다는 그냥 대립하는 상태에서 투표에 붙여지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민주주의는 다수결’이기 때문에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투표 후에 이러쿵 저러쿵 따지지 않는다.

국사 시간에 화백회의에 대해 배우면서, 또는 세계사나 윤리 시간에 고대 그리스에 대해 배우면서 만장일치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발전한 그리고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는 이상적이고 비효율적이라는 결론을 얻을 뿐 왜 만장일치제도가 있었고 어떻게 만장일치를 이룰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전체 의견이 처음부터 통일되기 힘들더라도 전체가 하나의 의견에 동의하기 위해 설득하는 과정이 있고 그를 위해 유연하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3.

투표를 통해 국회에 과반수 이상의 다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있다면 법을 새로 만들고, 고칠 때 다른 정당의 의견을 들을 이유는 뭘까?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이미 총선에서 결정된 과반수의 의석을 통해 4년 동안 국민들을 ‘대의’하면 되지 왜 굳이 공청회를 열고 여론조사를 하고 상임위원회 활동을 할까? 또 왜 시민들은 4년 임기의 국회의원을 뽑아놓고 거리와 광장에 나와 그들에게 시위를 할까? 학급회의의 그것과 절차적으로 형식적으로 다른 게 뭐가 있는 걸까? 최근 우리나라 국회에서 처리한 이른바 ‘미디어법’은 경우 다수당인 여당 의원과 소수당인 야당 의원 사이의 몸싸움과 투표 절차에서의 위법성 사이에서 ‘다수결’로 통과 되었다. 야당은 국회등원을 거부하고 거리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다르게 국회가 운영되고, 야당이 다수결의 원칙을 부정하는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전체가 하나의 의견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설득이라는 과정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서로간의 유연하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청회가 정상적으로 여러차례 시간을 갖고 열려야 하며, 여론도 반영해야 한다. 물론 이번처럼 여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문, 방송에 관한 법률의 경우에는 더욱 여야의 치밀한 논의와 함께 시민들과의 충분한 의사소통이 반드시 필요하다.

 

4.

작년 어느 대학의 입학을 위한 논술 시험에는 ‘대립하는 상황을 해결하는 서로 다른 방식’이 주제로 다루어졌다. 첫 번째는 설득이고 두 번째는 다수결, 세 번째는 강압이었다. 논제에서는 위 세 가지 해결 방식 가운데 가장 적절한 것을 하나 선택하고 그 근거를 밝힐 것을 요구했고, 또 그 방식의 문제점과 극복 방안을 제시하라고 했다. 고등학생이 해결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충분히 선택할 수 있다. 또 갈등의 해결 방법으로 ‘강압’이 ‘설득’이나 ‘다수결’보다 우세했던 최근의 여러 사회적, 정치적 사례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강압을 가장 적절하다고 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본다면 홍코너는 설득이고 청코너는 다수결이다. 홍코너의 설득 선수는 10라운드 정도되는 장기전에 유리하다. 아니면 라운드 구분없이 누군가 하나 포기할 때까지 싸우는 경기에 유리하다. 그만큼 상당한 양의 에너지와 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경기 결과에 대해서는 승패를 떠나 어깨를 걸어준다. 청코너의 다수결 선수는 3라운드 정도의 단기전에 유리하다. 대개 1라운드에서 KO로 끝내는 경우를 즐긴다. 투여된 에너지에 비하여 높은 효율성을 발휘하며 초반에 몰아붙이는 경우가 잦다. 이겼을 때 자만하는 경우가 많고 졌을 때는 소외감에 몸서리친다. 현재까지의 두 선수 사이의 전적은 다수결 선수가 우세하다. 당신은 누구를 응원할 것인가?

 

5.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너나 할 것 없이 대화와 타협, 화해와 협력을 얘기한다. 서로 잡아먹으려고 물어뜯지 말고 서로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서로 어깨를 걸고 자기 것을 나누는 게 협력이다. 잘못한 게 있다면 인정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며 상대의 그 용서를 받는 것이 화해다. 그 속에서 서로간의 유연하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대화이고 타협이다. 하지만 짐승의 가면을 쓴 채 한 손에 칼을 들고 어깨동무를 한다면, 거짓 용서를 구한다면, 서로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여전히 얇다면 그것은 야합일 뿐이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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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공격의 오류

이성 2009/06/15 11:55

인신공격의 오류

 

1.

가지고 있지도 않는 장점을 억지로 끌어내 칭찬을 하거나 있는 것을 과장한다면 그것은 아부라고 부를 수 있고 권장할 사항이 결코 아니지만, 반대로 다른 사람의 약점을 집요하게 긁어 대면서 논의의 본질과 상관없는 변죽을 울려가며 골탕을 먹이는 일 또한 피해야할 일임에 분명하다.

특히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는 글이나 말일 경우 보다 조심해야 할 일이다. ‘주장’이 아닌 ‘사람’을 문제 삼는 이것을 통상 ‘인신공격의 오류’라고 부르며 논리적으로 합당하지 않은 대표적인 오류 중의 하나로 꼽는다. 또 상대가 가진 약점을 자꾸 들추고 트집을 잡으며 화제를 끌고 가는 조롱도 온당한 대화 방식이라고 볼 수 없다. 다른 사람을 놀리며 키득거리는 모습은 그 상대방에게 심한 모멸감을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

하지만 지금은 인신공격이나 조롱이 판치는 세상이다. 사람들의 정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요즘의 TV 예능프로그램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시청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어떤 대화의 방식을 사용하는가? MC를 맡고 있는 고정 출연자와 매 주 바뀌는 출연자들끼리 서로 헐뜯고 상대가 혹여나 실수를 하면 빠트리지 않고 찾아 공격한다. 초대 받아 출연한 사람이 없는 프로그램에서는 MC들 서로가 조롱의 대상이 된다. ‘때린 곳을 또 때리기’도 하며 거기에 ‘네편 내편’은 없다. 심지어는 일부러 자신을 조롱거리로 만들기도 한다. 이른바 스스로 ‘비호감’이 되려고 애쓰며, 안티팬을 적극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그것을 보고 ‘웃는다’.

물론 바보, 뚱보, 못생긴 얼굴 등을 과장하여 그들의 어리숙하고 못난 언행을 보고 즐긴 일은 오래전부터다. 하지만 그것은 그 연기자가 분장을 하고 있을 때 뿐이다. 분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 입으면 더 이상 놀림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리얼리티’라는 개념이 새로 자리를 잡으면서 연기자들은 이제 출연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나 방송사와 상관없이 자신의 캐릭터를 어느 프로그램에서건 유지한다. 리얼리티를 표방하므로 어디까지가 실재 그 연기자의 캐릭터이고 어디서부터는 ‘설정’인지 구분할 수 없고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문제는 시청자들이 그것을 즐긴다는 점이다. 똑똑하거나 착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던 연기자보다 보통 사람보다 좀 모자르거나 못된 캐릭터의 연기자를 선호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상식 퀴즈나 체력 테스트 등의 여러 장치들을 동원하여 ‘평균에 못 미친다’, ‘TV를 보고 있는 당신보다 못난 사람’임을 증명하기도 한다.

자기 비하와 폄하, 다른 사람을 향한 비아냥과 막말이 넘치는 방송을 보고 시청자들이 즐거운 이유는 무엇인가?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3.

이른바 '찌라시'라고 불리는 매체 아닌 매체가 있다. 온갖 떠도는 이야기,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추측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증권가에 떠돈다고 하지만 연예인들의 사생활도 단골 손님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를 내기도 한다. 엑스 파일이니 와이 파일이니 하면서 호기심을 자극한다. 대형 신문들도 ‘찌라시 급’ 기사를 싣기도 한다. 권력을 가진 자, 특히 정치인들의 공개되지 않는 정보를 소문의 형태로 확장시키는 일도 그들의 장기다. 보통 스캔들이라고 부르는 수준에 머물기도 하지만 그 정도가 과하여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르기도 한다.

우리는 최진실의 자살을 두고 여러 가지 원인을 얘기했었다. 갖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겠으나 최진실을 향한 사람들의 무차별적 인신공격이 그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인터넷 게시판의 글과 그 글 아래에 댓글로 올라오는 조롱과 막말에 자존감의 심한 훼손을 경험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지가지 추측을 하는 것까지 나무랄 수는 없겠지만 사실관계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공연하게 떠도는 이야기들은 또 다른 소문으로 재생산되기 마련이다.

 

4.

확인할 수 없다면 더 조심해서 말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미 그런 것은 잊은 지 오래다. 사람들은, 우리는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익숙하게 즐거워하는 방식 그대로 현실에서도 즐거워한다. 아마도 선후를 가리자면 그런 현실을 피디와 작가, 연기자들이 잘 잡아 보여주고 있는 것일 터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로 종결될 수 있다. 우리는 왜 인신공격을 잘 하고, 또 좋아하는가?

인신공격은 비논리적이다. 상대의 논리에 대응할 자기 주장의 근거가 불명확할 때 우리는 ‘당신의 평소 모습을 볼 때’, ‘당신이 예전에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라며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는 일들을 꺼냄으로써 쟁점을 흐려버린다. 또는 ‘그건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며 작은 차이(작지만 중요한 차이임에도 불구하고)는 무시해 버리려고 한다. 또는 ‘입만 살아가지고’라며 자신의 비논리성은 시인하지 않고 상대의 실천과정과 그 결과를 무시해 버린다. 인신공격을 통해 유발되는 웃음은 조롱이다. 남을 깔봄으로써 얻어낸 웃음이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거울을 돌리지는 않는다. 스스로 작은 흠결이라도 없는지 살피지 않고, 또 흠이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답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이다. 


5.

‘노무현의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은 두고두고 여기저기 따져야할 문제다. 더 크게 이야기해야하는 구조도 있어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지만 그를 향해 비논리적 인신공격이라는 돌을 던졌던 사람들과 매체들, 그리고 그들의 손에 ‘이런 돌을 던져야지’, ‘이렇게 던져야 아프지’하고 알려줬던 권력자들은 스스로의 방식이 찌라시 수준에 불과했던 것을 인정해야 한다. TV 예능프로그램의 리얼리티와 연출 사이에서, 연기자도 때론 자성하고 사과를 하지 않던가?

 


계간 <논>, 200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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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화국

이성 2009/03/02 16:42

 

0.
나고 자란 나라나 지역의 언어를 잘 구사하는 능력 못지않게 외국어도 한 두 개쯤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인재’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변함없는 물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점점 좁아질뿐더러 그만큼 서로의 영향관계가 더할 수 없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외국어 구사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많은 언어 중에 유독 영어가 선택된 이유는 국제 사회에서 미국이 가진 막강한 힘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서로의 언어가 다를 때 어느 한 편도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나 지역 출신이 아니더라도 중간 언어로서 선택된다. 또 전 세계에 서비스 되고 있는 수많은 웹사이트와 지식의 확장을 꾀하는 유명 저널의 절대다수는 영어로 표기되어 있다. 영어는 전 세계인과 호흡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다. 만약 미국이 지금과 같은 독주를 지속하지 못하고 어느 순간 무너지더라도 언어 변화가 가진 보수성으로 인해 영어는 쉽게 그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다.
외국어, 특히 영어를 잘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한참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던 ‘아륀지’ 사건이 보여주듯 영어를 잘한다, 잘해야 한다는 차원을 넘어선 문제가 있고, 그 문제의 심각성은 ‘아륀지’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더라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1.
사실 순진하게 생각하면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었던 그분이 말하려는 바는 영어를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자는 뜻일 것이다. 정말 텍스트 그대로라면 말이다. 그 정도라면 누가 탓할 수 있을까? ‘국영수’라고도 하고 ‘언수외’라고도 하면서 10년 넘게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지만, 또 국어를 뒤로 돌릴 수 없는 처지란 것을 감안하면 수학과 함께 1등, 2등에 해당하는 중요 과목으로 대접 받은 게 오래되었고 요즘에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정규 교과과정에 편성되어 가르치고 배우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해도 외국인을 만났을 때는 쉽게 영어가 나오지 않는다.
나 역시 대학을 졸업한 뒤 영어를 공부할 별다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은 문법은 저편에 두고, 저급한 수준의 단어 조합 정도밖에는 못한다. 의사소통이라고 할 게 없다. 급한 말만 겨우겨우 찾아하는 수준이다. 외국인을 만나야 한다면, 그리고 만난다면 삐질삐질 땀을 흘릴 게 뻔하다. 영어가 필요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보다 수준 높은 영어를 구사하기 위해 대학을 다닐 때는 물론이고 직장인이 되어서도 영어 회화 능력을 키우거나 영어 관련 능력 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새벽부터 영어 학원의 문을 연다.
열거할 사항은 수없이 많다. 몇 년 전 이야기지만 영어공용어화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r/발음과 /l/발음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라며 아이들 혀 아래의 설소대를 잘라내는 수술이 성행한 끔찍한 일은 가히 엽기적이지만 현실이다. 지자체들이 앞을 다투어 영어마을을 짓고 자치단체장들은 재선과 국회로의 진출을 위한 업적으로, 지역 주민은 아파트값 인상으로 그 이익을 챙겨가는 일도 현실이다. 조기 유학과 기러기아빠의 문제는 더 관계가 복잡하지만 그 속에 영어 교육의 문제도 똬리를 틀고 있음은 분명하다.

 

2.
상황이 이러하니 영어 교육에 대한 논란은 끊이질 않는다. 그리고 곧장 보다 많은 영어 교육 시간과 비용을 요구하게 된다. 물론 영어집중교육, 원어민 교사 충원, 영어 교사들의 연수 강화 등의 방법론들도 다양하게 제기되고 적용된다. 문제는 이토록 영어교육에 애쓰는 배경과 구조다. 모두가 ‘글로벌 인재’가 될 필요가 없고 글로벌 인재는 영어 구사 능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필요한 영어 구사 능력의 수준이란 게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이토록 영어에 열을 올려 가히 ‘영어공화국’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또는 이를 통해 얻게 되는 결과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내가 얻은 결론, 염려는 이런 영어공화국 현상은 결국 학력에 따른 차별 구조가 더 단단해 질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학력 수준, 즉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경제력과 직업 선택의 폭이 상당부분 정해지는 구조는 부정하고 싶어도 잘 부정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다. 서울대가 아무리 지역균형할당을 통해 신입생을 선발하고 또 다른 대학에서 사회적 배려 대상자를 위한 전형을 실시한다고 해도 극복되지 않는다. 몇몇 극소수 그 틈을 비집고 성공한 모델들이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런 모델들은 ‘이것 봐라, 너희가 열심히 안해서 그런 것이지 제도와 구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렇게 징징거릴 시간에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워라’고 말하는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필 영어인 까닭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수학은 대입수학능력시험을 통해 뚜렷하게 등급을 나눌 수 있고,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단원을 강조하고 우대함으로써 점점 더 그렇게 제도화되고 있다. 예전 같이 ‘미적분 배워 어디에 써먹냐’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영어는 어지간하면 수학처럼 하겠지만 오히려 토익이나 텝스와 같은 자격 시험이나 능력 시험을 통해 객관화된 성적을 요구하는 편이 이모저모 합리적으로 보이는 편리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대신 그 정도는 보통 사람들도 이 악물고 노력하면 되는 선이고 그 보다 더 높은 수준의 영어 능력을 세상과 사회가 필요로 한다는 명분으로-미국이 지배하는 글로벌한 세상이니까-정말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잘할 수 있는 조건과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 예를 들면 장기어학연수와 조기유학을 다녀온 사람들과 국제학교와 특목고 출신에게 유리한 전형과 선발 방식을 유지하거나 개발함으로써 계층별 차별 구조에서 상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 지위를 내놓거나 확대할 필요가 없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 영어 교육 강화는 ‘학교에서 이만큼이나 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는 명분으로 작동할 것이다. 거기에 더해 지금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의료계와 법조계의 전문 인력이 되기 위해서는 의학전문대학원과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 졸업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든다는 지적도 있다. 없는 사람은 물론, 적당히 돈이 있는 사람들도 따라가기 힘든 수준으로 해 놓으면 따라가려고 해도 따라갈 수 없는 셈이다.

 

3.
이제 겨우 네 살인 나의 둘째 아이는 아내가 여섯 살인 첫째 아이한테 읽어주는 책을 같이 봐서 그런지 부모가 생각하기엔 몰라도 될 만한 것들을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알파벳도 그런 경우다. A는 apple, B는 bus 이렇게 이어지는 작은 단어장과 ABC 노래, 그리고 알파벳 자석 장난감을 가지고 놀더니 알파벳을 모두 알아버렸다. 그게 재미있는지 첫째 아이는 아직 혼동하는 소문자도 먼저 알아버렸다. 그리곤 요즘은 영어 단어를 알려고 부쩍 흥미를 보인다. 자연히 욕심이 생겼다. 네 살부터 영어를 해야 한다는 학습지의 전단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등학생도 안되어 보이는 남매가 영어로 대화하는 TV 광고를 보면서 욕심이 더 커졌다. 첫째 아이는 보내지도 않고 시키지도 않은 ‘뭔가’를 해야하나하는 혼란과 불안도 같이 왔다. 하지만 아내와 나의 상의는 오래가지 않았다. ‘따라갈 필요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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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이성 2008/11/21 11:48

전쟁과 평화

 

0.

지금 우리가 평화롭기 때문일까? 전쟁은 실감나지 않는 실체다. 엄청난 화력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휴전 상태의 한국에서 살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전쟁에 대해 무덤덤하다. 혹시 북한과 전쟁을 다시 치르게 될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거기에서 그친다. 이라크에서의 김선일 씨의 죽음이나, 아프가니스탄 무장 단체에 납치됐었고 생명을 잃은 샘물교회 사람들의 사건처럼 전쟁이나 테러에 대한 분노나 공포는 존재하지만 그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미군에 의한 이라크 민간인 오폭으로 팔다리가 잘려나간 어린 아이의 모습이나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의 자살폭탄테러로 인해 엉망이 된 거리의 모습 등은 그보다 더 찰나적이다. 문제는 전쟁에 대해 무덤덤한 만큼 평화에 대해서도 특별한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1.

나는 군 생활의 일부를 연천의 GOP에서 보냈다. 흔히 ‘최전방 철책’이라는 부르는 곳이다. 군인을 포함하여 사람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것은 물론이고 ‘쥐새끼 한 마리 얼씬 거리지 못하게’하는 일을 주 임무로 삼는 곳이다. 연말이 되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털 달린 두툼한 점퍼를 입고 세퍼트와 함께 철조망을 따라 순찰하거나 한쪽 손에 소총을 들고 높은 초소에 우뚝 서서 해지는 북녘을 바라보는 바로 그곳 말이다.

칼바람 부는 한겨울 밤, 대남방송과 대북방송이 쩌렁쩌렁 울리는 그곳 철책 앞에 서면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저 어둠 건너에도 나와 같이 소총과 실탄, 그리고 수류탄을 들고 있는 북한군이 있겠지라는 생각도 들고, 꼭 전쟁이 아니라도 혹시라도 우발적인 교전이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철책은 조용했다. 대남방송도 대북방송도 없는 시간대에는 더욱 조용했다.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순찰일지와 근무일지에는 ‘특이사항 없음’과 ‘근무 중 이상 무’만이 가득했다. 화창한 봄날에는 ‘평화롭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아, 이 무슨 넌센스인가.

내가 가진 소총은 물론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드는 무기고에 가득한 탄약과 폭탄들은 도대체 무엇이며, 나를 비롯한 많은 군인들이 남쪽과 북쪽으로 나누어 서있는 건 무엇이며, 이렇게 된 본래의 구조는 어디에서 어떻게, 왜 만들어진 것인가?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 당시 나에겐 그리 심각한 과제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군인이었고, 조용한 철책은 도리어 잔혹한 전쟁과 그 구조에 대해 무덤덤하게 만들었다.

상황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진짜 평화’가 아닌 ‘거짓 평화’에 익숙하여, 또는 내가 처한 현실의 안락함에 기대어 전쟁과 테러에 대해서는 그저 ‘나쁜 것’이거나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물론 당신에게도. 

2.

앞서 말한 것처럼 가끔씩 자극은 받는다. 2004년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가 이슬람 무장 단체에 의해 납치되고,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텔레비전에 나올 때, 그리고 결국 참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테러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분노를 가졌다. 하지만 지금도 이라크에는 자이툰 부대가 그대로 있다. 만약 이라크에서 철수한다면 김선일 씨의 죽음과는 아무 인과 관계 없는 철군일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아주 잠깐 분노를 가졌을 뿐, 우리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인 이라크에 있는 무장 단체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민간인 인질을 동원한 매우 치사하지만 동시에 매우 효과적인 전략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럼, 1999년과 2002년 서해에서 발생한 북한 해군과의 교전은 당시 어떤 느낌을 주었는가? 그 때 전쟁이나 포성과 총성에 대하여 공포를 느꼈는가? 아니면 ‘우리 해군이 이겼다’라는 승리에 더 집착했는가? 우리는 정말 김선일 씨의 죽음과 서해 교전을 통해 전쟁이나 테러를 경험한 것인가? 결국 그렇다면 그 반대에 있는 평화를 생각한다는 일은 완전히 다른 곳의 이야기일 것이다. 

3.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청일전쟁(1894-1895)과 그 뒤의 러일전쟁(1904-1905)이다. 동학농민운동을 막아 조선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청과 일본 두 나라의 군대가 모두 조선의 영토로 들어와서는 서로 전쟁을 벌였고, 승전한 일본은 조선을 자신의 세력 아래 두었다. 조선을 보호하겠다고 했지만 실은 통치하길 원한 것이다. 중국의 동북지방을 거쳐 조선에도 세력을 미치려하던 러시아는 반대로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일본과 부딪혔고 일본이 다시 승리했다. 일본은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가 침략했던 요동반도를 포함한 중국의 동북지방을 자신의 영토로 삼았고, 조선을 완벽히 장악할 수 있었다.

아니 이게 뭔가? 조선과 중국의 동북지방을 두고 왜 다른 나라끼리 전쟁을 벌였는가? 당시 일본은 조선인과 중국인을 지도하여 아시아를 침략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에 대항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통의 일본인들은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내무성의 감시 아래에 있던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그들에게 전달되던 내용은 그게 모두였고, 조선과 중국 사람들이 왜 일본인을 미워하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약한 조선과 중국을 침략한 자신의 과오는 보이지도 않고, 유럽 열강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는 말만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을 외세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중세의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와 유럽 국가들처럼 발전된 나라로 만들겠다는 사상가와 혁명가들이 조선과 일본에 있었고 그들에 의한 얼마간의 근대화가 진행되기도 했지만 그들은 자국의 세력을 넓히려는 욕망에 가득한 정치가와 군인들을 이기지 못했다. 군국주의에 빠져 스스로가 저지르고 있는 침략과 그 결과는 보지 도 않았고,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1)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면서 전쟁의 규모는 훨씬 커졌고, 그 전쟁의 참혹한 결과도 더 커졌다. 하지만 전쟁의 원인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크고 힘이 센 나라가 작고 힘없는 나라를 도와주는 일은 마땅한 일이며 아름다운 일이나 진정으로 작은 나라에게 이로움을 주는 일인가는 따져보아야 한다. 돕겠다면서 뒤통수를 치고 자국의 이익만 취하는 경우가 거의 전부이기 때문이며, 그 게 바로 전쟁이 발발하는 변하지 않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4.

그러면, 왜 상대를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끼어들면서 실은 자신의 세력 하에 상대를 두려고 하는 것일까? 자신의 크기를 키워 더 큰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절박한 지경에 이른 상대가 존재하는데 그런 것은 일단 무시한다.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인도차이나에 이르기까지 침략 전쟁을 벌이면서 강제 징병과 강제 노역, 군대를 중심으로 한 경제 체제의 운영과 정책의 개발을 계속 이어갔는데 그런 과정에서 혹사당하거나 처참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은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을 자신과 같은 레벨에 위치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내선일체라고 생각했다면, 형제를 노예처럼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너무나도 영화 같았고 그래서 더 끔찍했던 9.11 테러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속되는 유혈 공방에 대해서도 알 것이다. 인류의 역사와 거의 일치할 만큼 오랜 시간 동안의 불공평한 관계와 서로에 대한 몰이해가 빚어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현대로 오면 올수록 서로에 대한 불신을 터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더 많은 불신이 쌓이고 있고 그것으로 인한 갈등은 더 참혹하고 잔인한 전쟁과 테러로 커져가고 있다. 힘 센 국가는 ‘저들은 악마다’라고 자기 입맛에 맞춰 해석하고 자기 멋대로 단정을 지어버린다. 힘없는 사람들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극단적인 보복논리를 이어나가고 있다. 부시는 9.11 이후 이라크 전쟁의 개전을 선언하면서 ‘억압된 이라크 민중을 해방’시키겠다며 막강한 군사력으로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사담 후세인을 체포해 교수형 시켰지만, 절박한 지경에 이른 이라크 사람들의 삶은 나아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라크 사람들은 미군에 의해 해방됐다기 보다 점령당했다고 보인다.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갈등2)이 더 높아지고 그로 인한 테러가 이어지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테러와의 전쟁’이 다시 테러를 부르고, 미국은 그 테러와 다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5.

이야기의 방향을 바꿔보자. 다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거짓 평화’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려고 한다. 일단 먼저 전제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병영국가의 그림자를 벗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의 경험과 분단이라는 실재, 그리고 박정희가 탱크와 총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 한동안 군인들이 비민주적 절차를 통해 국가 최고 권력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들이 사람들을 마구 눌러대며 만들어진 군대, 곧 병영에서 필요한 강제적이고 집단적인 행동과 사고들이 여전히 우리 주변에 가득하다. 우리는 마치 바짝 군기가 든 신병처럼 파닥파닥 움직이고 긴 호흡의 사고보단 단선적인 행동을 서로에게 요구하고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첫째, 겉으로 보이는 쉬운 예를 찾아보면 이젠 다행히 산업 ‘전사’라고까지는 부르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들은 출근 ‘전쟁’을 해야 하고 자식들의 대학 입학을 위해서는 합격 ‘전략’을 세워야 한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서로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다른 방법이 많이 있는데 회사나 단체 중에는 여름이면 해병대나 특전사의 군인들이 받는 훈련을 본뜬 특수부대훈련 체험 캠프를 다녀오는 곳도 있다. 심지어는 가족끼리 자진해서 가기도 한다.

둘째, 위에서 예로 든 것처럼 우리의 일상에는 군대식 사고와 행동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실제 군사적 의미 테두리 안에서 봐도 결코 평화롭지 못하다. 휴전과 분단이라는 절대적인 상황, 모두에게 부여된 의무인 군복무와 막대한 국방비 지출, 상당한 면적의 군사 시설과 훈련장 그리고 그곳이 안고 있는 환경문제, 북한 핵문제를 비롯한 각종 안보 문제, 주한 미군의 주둔, 안보 요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각종 경제 수치, 양심적 병역거부 논쟁 등의 사안들은 우리가 병영에 살고 있다는 실체적인 증거들이다.

셋째, 가장 핵심적인 사항인데 우리 역시 과거의 일본이나 지금의 미국처럼 작고 힘없는 나라를 도와준다고 하면서도 진정으로 작은 나라에게 이로움을 주는 일을 하지 않고, 내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우리와 다른 상대에 대하여 폭넓게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평함보다는 내 편의에 의하여 이미 선을 긋고 있다는 점이다. 대단히 위선적이게 말이다. 이런 세 가지 점은 우리가 평화롭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가짜 평화, 거짓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6.

하여 우리는 거짓 평화를 누리기에 국익의 이름으로 이라크에 파병을 할 수 있었다. 이라크전의 명분이 워낙 약하고 그 전쟁의 결과가 뻔히 예상됨에도 불구, 미국과의 관계 형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우선한 것이다. 용서과 화해, 그리고 평안이라는 진짜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조금 다행스러운 것은 경계를 위해 필요한 전투병을 최소화하고 의무 부대와 공병 부대를 파병했다는 점이다. 다소 치사하거나 비겁해 보이기도 하고 점령군이라는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보다 의미를 둘 수 있는 부분은 파병 결정의 선후에서 이익이 얼마냐가 아니라 도덕에 대한 옳고 그름을 가리는 논쟁이 상당한 힘을 가지고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거짓 평화에 대한 반성이 있었기에 반대가 가능했을 것이다. 베트남전 때와 비교해보면 우린 그만큼 평화에 가까이 간 셈이다.

몇 해 전, 나가사키3)에 여행을 갔을 때 원폭투하지점에 조성된 평화공원과 기념관을 들렀었다. 기념관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며 나왔을 때 일행 한 사람이 다소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들은 평화를 얘기하고 있지만,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반성은 찾을 수 없다.”고 말했었다. 평화의 가치가 이상적이고 뜬 구름 같지만 그 시작은 간명하다.


주석))

1) 한편, 우리 모습도 냉정하게 바라봐야 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조선의 최고 권력자들은 어땠는가? 외세 사이에서 엄정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목소리를 내어 조선의 이익을 지키려고 했는가? 아니면 외세 중 어느 한편에 서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애썼는가? 보다 단순하게, 동학농민운동 당시 위정자들이 각각 청과 일본에게 ‘도와줘, 지금 조선에는 당신의 힘이 필요해’라고 메시지를 ‘전혀’ 보내지 않았는데, 그들이 자진해서 ‘파병’한 것일까? 또 국권 상실시기 조선의 최고 권력자들이 큰 나라인 일본과 러시아가 작은 나라인 우리를 순수하게 도와주려는 의도만을 가지고 있다고 추측하고 ‘플리즈, 헬프 미!’라고 외쳤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2)슬람교 전체로 볼 때는 시아파가 소수파이나 이라크의 경우는 소수인 수니파 지도자인 사담 후세인이 다수인 시아파를 통치했었다. 현재는 이란과 같이 시아파가 다수이며 정권도 쥐고 있으며 권력의 이동과정에서 많은 갈등이 폭발하고 있다.

3) 나가사키는 1945년 8월 9일, 미군의 원자폭탄으로 시 중심부가 대부분 파괴된 곳이다. 피해의 정도는 히로시마에 비해 덜했다고는 하지만 3만 9,000명이 즉사했으며 2만 5,000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일본의 항복과 우리의 해방이 이어질 수 있었지만 당시 미군이 원폭을 꼭 사용했어야 했는가에 대한 비판이 많다.



* <논>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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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르게, 양껏 먹고 싶다고?

이성 2008/07/23 22:38

배부르게, 양껏 먹고 싶다고?

 
0.

맛있는 음식, 요리 잘하는 식당, 이름난 주방장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나 기사들은 언제나 방송국과 신문사 앞에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마다 제철에 맞는 음식, 개인의 체질에 따른 맞춤식 건강식과 ‘웰빙 라이프’를 누릴 수 있는 녹색 음식들의 리스트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와인 빈티지 차트와 감미로운 혀와 언어들로 만들어진 가이드, 그리고 배경이 되는 음악들은 대낮의 무더웠던 도시에서 살짝 탈출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며 대형 마트의 번잡함 속에 우물쭈물하던 카트를 와인 코너 앞에 잠시 멈추게 한다. 적절한 영양과 이야기를 담은 그야말로 맛있는 음식 앞에서 우리는 평소의 소박함을 조금 숨기고 아주 약간 뻐기며 또 그만큼 즐거워한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정성, 한우 농가들의 한숨, 정부의 굴욕적 외교 방식과 졸속협상, 시민과의 소통부재,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커다란 파도까지 모두 걱정되지만, 동시에 육식을 거부하지 못한 채 생산지와 상관없으니 정말 싸고 맛있는 ―당연히 안전한!― 쇠고기를 ‘배부르게 양껏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쌀 한 톨의 소중함을 배워 알고 있고 또 가르치고 있지만 식당과 집에서 남기는 밥과 버리는 음식들은 다 무엇이며, 비우자마자 금방 차오르는 음식물쓰레기통에서 피어나는 냄새를 역겨워하고 있는 모습도 어쩔 수 없는 것일까?

 
1.

지구의 다른 편, 아니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배부름’, ‘맛’, ‘건강식’ 등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국제연합 산하의 식량농업기구(FAO :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의 2006년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에는 8억 명의 사람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으며, 매일 25,000명 이상의 사람이 기아로 사망하고 있다. 더군다나 어린이는 5초에 한 명 꼴로 굶어 죽고 있으며 비타민A 부족으로 시력을 잃는 사람은 3분에 한 명이라고 한다.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잠비아는 만성적인 기아에 허덕이고 있지만, 세계에서 수확되는 옥수수의 무려 4분의 1은 소가 먹고 있고 캘리포니아에 있는 소 사육농장의 절반에서 연간 소비되는 옥수수는 잠비아가 1년간 필요한 옥수수의 양보다 더 많다. 물론 그 옥수수를 먹고 자란 소는 우리나라에 ‘싸고 맛있는 쇠고기’로 수입된다.

금식이나 단식은 자신의 굳은 의지가 담기지만, 영양섭취가 극도로 부족한 상태를 가리키는 ‘기아’는 자신의 의지와 아무 상관이 없고, 따라서 굶주린 개인이나 그 주위를 둘러싼 소규모 집단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도리어 기아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국가 스스로의 힘으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구조를 안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이는 돌발적인 상황, 예를 들어 2008년 5월의 버마처럼 태풍으로 인해 갑자기 식량이 바닥나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을 수 있어 긴급구호가 필요한 ‘경제적 기아’의 경우거나 외부의 재해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 구조에 의해 오랜 시간에 걸쳐 식량 공급이 지체되어 다수의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이 비타민과 단백질 부족에 따른 영양실조 등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구조적 기아’의 경우 모두 해당한다.

기아는 단순히 배고픔이 아니라 굶주림과 사망을 의미한다. 또 그것을 야기하고 있는 구조와 그 문제에 대한 책임 문제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농담으로 쉽게 던지는 ‘배고파 죽겠다’는 말이 한 톨의 거짓도 없이 적용되는 곳들은 세상에 널려있다.

 
2.

얼마 전 마닐라의 한 쓰레기장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필리핀의 아이들의 생활을 텔레비전 방송에 나왔다. 아이들은 누더기를 입고 있었고 다 떨어진 신발이라도 신고 있으면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한다. 종일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뒤져 상한 것이 분명한 음식을 입에 넣는다. 썩은 채소, 말라비틀어지거나 부패한 빵이나 과일 등이다. 기생충이나 피부병은 배고픔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이들은 낯선 외국인에게 연신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민다. 이 아이들에게 꿈은 없었다.

그 방송을 접했을 때 뚜렷한 그림이 그려졌는데, 나의 필리핀 여행의 경험 속에서 머릿속에 선명한 사진으로 남아있는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잘 알려진 휴양지인 보라카이 섬의 하얀 백사장과 야자수, 그리고 컴퓨터 바탕화면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석양이다. 다른 하나는 마닐라 국제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부터 작은 창밖 아래로 보이는 필리핀의 가난이다. 대충 하늘만 가린 판자들이 끝을 모르게 잇대어 있고 그 사이 사이에 멍한 눈빛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지저분한 개천과 그 옆에 웅크려 있던 아이들……. 보라카이 섬의 아름다움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어떤 희망도 읽을 수 없었다.

‘가진 게 많아 가난한 땅’인 아프리카는 어떤가? 2000년을 기준으로 아프리카의 인구는 세계 인구의 15%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전체 기아 인구의 25%가 아프리카에 있다. 그 중 시에라리온은 세계 최대, 최고의 다이아몬드 생산국이다. 세계 각국에서 영원한 아름다움, 소중한 언약의 징표이자 부와 명예의 상징인 다이아몬드지만,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는 ‘피의 다이아몬드(BLOOD DIAMOND)’라고 불린다. 11년 동안의 내전으로 35만명 사망, 25만 여성의 유린, 7,000명의 소년병 양성, 6,000명의 사지절단, 그리고 인구의 3분의 1인 200만 명은 난민이다. 물론 그 난민들은 모두 기아에 허덕인다.

그 비싼 보석인 다이아몬드를 세계에서 최고로 생산하는 나라인데 아무리 원석의 값을 안쳐준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한 국가의 상황이 이렇게 엉망일 수 있을까? 정권의 부패와 빈부격차를 줄이겠다고 등장한 군벌이 애초 반란의 명분은 상실한 채 다이아몬드 채굴권을 둘러싼 이권 다툼에만 몰두했고, 결국 내전과 쿠데타의 악순환만 되풀이 되었다. 반군들은 소년병들에게 환각제를 먹이고 인근 양민들의 신체를 절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시에라리온 말고도 아프리카는 내전, 가뭄, 질병 등의 이유로 국경을 넘어 난민 캠프를 찾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어렵게 도착한 난민 캠프에선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만 선별하여 음식과 의료 지원을 하고 있다. 누더기 안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영양실조로 시력과 뇌에 손상을 입은 아이들이다. 많은 아이들은 고통스럽게 숨을 거둔다. 물론 전문 인력과 엄청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자본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난한 자의 삶과 죽음을 선별하는 것이다.

북한은 어떤가? 1995년부터 2000년 사이에 무려 200만 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유니세프와 FAO의 2004년 조사에 따르면 15세 미만 아동의 37%가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이며, 젖을 물려야 하는 어머니들의 30%도 영양실조로 빈혈증세가 있어 자신의 아이들에게 충분한 젖을 먹이지 못하고 있다. 그럼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산다는 우리는 어떤가? 우리나라 초등학생 100명 가운데 한 명은 생활 형편이 어려워 굶어본 경험이 있다고 한다. 월 소득 100만원 미만의 저소득층 초등학생 중에는 5.4%가 결식아동이다. 2004년 대구에서는 4살짜리 남자 아이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굶어죽는 일도 발생했다. 2살짜리 여자 아이는 극심한 영양실조로 숨지기 직전에 발견됐으며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는 아버지는 ‘한 달에 일주일 정도 굶었다’고 말했다. 저소득 노인들의 유사한 사건들도 허다하다.

 
3.

물론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은 현재 지구의 인구 두 배도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다. 자, 굶어죽은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과 불합리한 세계에 분노가 생기는가? 그러나 잠깐, 동정심이나 분노를 발휘하기에는 아직 이르며, 더 중요한 점은 우리가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가난에 대해 이미 오래 전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왔고, 필리핀 아이들의 처참한 생활도, 북한의 굶어죽는 아이들의 얘기도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이 ‘핵무기를 만드는 동안 우리가 퍼 줬다’고 떠드는 쌀과 비료에 대해서도 이미 10년 전부터 들어오던 얘기다. 또 아프리카의 실상을 생생하게 전달한 탤런트 김혜자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베스트셀러가 아니던가? 오드리 햅번에게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하는 말은 전혀 생소한 말이 아니지 않는가? 또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우리에게 다가온 낯선 국가 ‘토고’와 키 큰 골잡이 ‘아데바요르’ 덕분에 우리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축구가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자 현실 극복의 희망을 주는 스포츠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았던가?

죽도록 가난한 그들에 대한 동정심,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 사회 구조와 정치가들에 대한 분노 이전에 우리는 실은 외면과 무관심에 훨씬 익숙하다. 그들을 돕는 것에 이르기 전에 제대로 아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멜서스를 주목해 보자. 멜서스는 이상한 경제학자이자 성직자인데, 그는 ‘인구론’을 통해 식량 부족은 인구의 증가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기아로 인한 사망은 과잉인구를 조절하는 적극적인 수단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기아는 사회 구조나 제도의 개혁을 통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멜서스의 의견을 따라 기아로 인한 사망은 자연스러운 인구 조절 수단이니, 가만히 외면하거나 무관심이 정답인 셈이다. 또 개인의 양심이나 불합리한 세계에 대한 분노, 제도 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멜서스의 등 뒤에 드린 그림자에 숨어 있는 꼴이다.

 
4.

인간이 사는 세상은 야생의 정글과 무엇이 다른가? ‘약육강식’, ‘승자독식’, ‘적자생존’의 법칙이 큰 소리를 칠 수 있고, 으르렁거리며 경쟁하고 싸워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이라면 무엇을 바라볼 수 있을까? 누군가에 의한 도덕적인 선행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가? 빌게이츠처럼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후 정승처럼 자선사업에 몰두하는 사람이거나 젓갈을 팔아 수십억을 기부하는 노량진수산시장의 할머니처럼 말이다. 비만과 잉여농산물의 처리를 고민하는 한 쪽에서는 다른 한 쪽이 굶주림 때문에 고통 받는다고 해도 그들만의 문제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면 그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기아에 허덕이는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은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사안들이 아니다.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 때문에 발생한 2억 5,000만 명 이상의 환경난민의 처지는 누구에게 책임이 있을까. 자연재해는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또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이권과 다이아몬드를 통한 행복은 과연 누가 가지고 가고 있는가?

1960대에 독립한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은 유럽의 식민 지배를 받을 때 정작 자신들에게 필요한 농작물을 짓지 못했다. 차드에서는 면화, 부룬디와 르완다는 차 농사를 지어야 했고, 세네갈은 땅콩 농사에 매달려야 했다. 그렇게 단일경작되어 생산된 농산물들은 값싸게 유럽으로 넘어갔고, 비싼 값을 지불하고 주식으로 삼는 곡물들을 다른 나라로부터 사와야 했다. 그런데 이 구조는 독립을 이룬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는 스스로 식량을 자급자족할 능력을 가지고는 있지만 정작 스스로 필요로 하는 작물을 농사짓지 못하고 있다. 유럽으로의 수출용 작물은 여전히 재배하지만 소수의 관료조직과 지배계급은 수매가격과 수출가격의 차액을 통해 배를 불리고 있다. 수입하는 곡물들도 같은 과정을 밟아 비싸게 공급되고 있다.

식량은 풍부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이를 사올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세계는 높은 이윤을 추구하는 대규모 금융자본의 손에 많은 권력을 쥐어주었다. 세계 곡물시장의 가격 조작, 식량의 대량 폐기 처분 등은 그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자본이 작동된 결과이지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절망을 더할 뿐이다.

 
5.

종종 여러 매체를 통해 볼 수 있는 비행기를 통해 낙하산을 달고 떨어지는 구호품과 그것을 향해 달려드는 난민들의 모습은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는 방법도 아니고, 실체적 진실을 보여주고 있지도 못하다. 재난을 입은 국가에 대한 선진국, 잘 사는 국가들의 긴급구호와 유엔 등의 국제기구를 통해 지원되는 물품들은 일시적이거나 부족하다. 선교를 목적으로 하든 순수한 봉사를 목적으로 하든 NGO와 그에 속한 사람들의 헌신은 너무 소중하지만 전문가와 봉사자는 더 많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상황을 정확히 아는 것과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 공동체로서의 자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 처지에 대해 가감 없는 전달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빌게이츠와 같이 정글에서 승리한 자의 자선은 소중하지만 그가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세계 경제의 ‘경쟁 방식’과 ‘독과점’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대규모 자본을 위한 시장의 자율에 근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기아 문제에 대하여 잘해야 대증요법 밖에는 답하지 못한다. 문제의 원인은 여전히 잠복해 있을 것이고 더 가속화된 현실로 드러날 것은 새까만 밤에 타오르는 불을 보듯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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